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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光

여름빛 글 커미션

 

 

 

ⓒ하늘나무 님

 

 

 


 

 

나츠를 보고 있자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눈이었다. 호박색의 눈. 어떤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도 무언가에 열중하면 누구보다 동그랗게 뜨여진 채로 빛나는 눈. 특히 자신의 꿈을 향해 드리블할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눈.

나츠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후, 나는 꽤 유심히 나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 녀석이 도대체 좋아할 데가 어디 있다고 좋아하기 시작한 걸까’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다. 관찰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나의 눈은 무의식 중에도 나츠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시선이 가는데 좋아하는게 아닐 리가. 내가 표정관리를 하지 않았다면 나의 시선은 누가보아도 친구를 보는 눈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가끔은 아주 티를 내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눈으로 나츠를 보는 저 애들에게.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애초에 나츠가 나에게 실망할까봐 꿈을 포기한 이유조차 말하지 못했는데, 더 쉽게 관계를 망가뜨릴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감언이설과 연기로 그 애들을 나츠로부터 떼어내는 것이었다. 처음은 꽤나 긴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워지고 당연해졌다. 그 애들이 나츠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 아닌 동경으로 인식하도록 한 정도였으므로 딱히 죄책감이 들 일도 없었다. 

 

내게 다행인 사실은, 나츠가 굉장히. 매우. 엄청나게 눈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가 조심해야 할 대상은 나츠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눈치 채고 나츠에게 떠벌릴 누군가였다. 관객이 한 명 줄었다는 사실은 연기를 하는데에 굉장히 커다란 이점이었다. 또 내가 아주 예전처럼 허물없이 굴어도, 그것을 우정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괜히 어깨동무를 한다던가, 마주걸어오는 나츠의 이마를 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던가, 옷이 아닌 팔뚝을 잡고 나츠를 이끈다던가. 하는 사소한 것들을 우정이라는 틀 안에서 성공 할 수 있었다. 나츠와 아주 가까웠던 나의 어린시절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나는 그렇게 완벽한 ‘친구’의 가면을 쓴 채로 나츠의 앞에 섰다. 나츠를 좋아하는 인간인 치와 히카루가 아닌 나츠의 친구의 뿐인 히카루로서. 신기하게도 연기 실력과 마음의 크기는 비례했다. 마음이 커질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친구를 연기했으며 연기가 늘게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마음은 저절로 커졌다. 처음에 ‘너 나츠 좋아하냐?’ 하는 장난섞인 말로 의심하던 친구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럼 그렇지, 너가 나츠를 좋아할 거라고 잠깐이라도 생각한 내가 멍청이지’라며 의심을 거둘 정도로 완벽했다.

 

나의 열연으로 만들어진 평화는 정말이지 달콤했다. 시간을 비디오 테이프마냥 반복 재생할 수 있다면 나는 틀림 없이 이 순간을 고를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의 봄을 영원히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연두빛 초여름의 나무 아래에서 내가 그런 말을 뱉은 것은 절대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때처럼 축구부 활동이 끝난 후, 나는 히카루와 하교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히카루의 등 너머로 사물함이 보였다. 그리고 히카루가 집어든 것은 편지, 어. 러브레터? 저 조용한 녀석도 러브레터를 받는구나. 약간의 신기함과 다수의 장난기를 장착하고 히카루에게 다가갔다.

 

“히카루! 그거 뭐야?”


“아. 누가 편지를 뒀네.”


“오오오 러브레터~? 히카루 너 인기 많았구나! 오오오~”


“인기가 많긴 뭘. 그리고 거절할거야! 거절할 거라고.”


“아. 그래? 알았어.”

 

은근 슬쩍 히카루를 놀리려더 계획은 예상 외로 부정적인 히카루의 반응에 금새 무너졌다. 히카루는 형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학교에서 버리는건 예의가 아니라서 가져가는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 빠르게 걸어갔다. 

인기 많은게 싫은 건가. 특이하네. 

그러나 히카루는 평소에 비해서 놀린 것도 아니었던 나의 반응에 상상 이상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굣길을 반 이상 걸어갈 때 까지 나에게 등을 돌린채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히카루를 느긋하게 뒤쫒아갔다. 몸은 느긋했지만 마음은 느긋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화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하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한마디를 던졌다.

 

“그, 히카루.”


“왜.”


엄청나게 화난 상태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히카루의 말투가 날카롭지 않았다. 좋음 단계는 아니었지만 보통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 화 풀렸냐?”


“화난 적 없었어. 니가 착각한 거겠지.”


“아 난 또 아무말도 없길래 화난 줄 알고 쫄았네.”


그렇게 마주본 히카루의 표정도 딱히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정도의 얼굴. 몇 번 힐끔거리자 히카루가 턱을 치켜세우며 뭐 할말 있냐는 눈빛을 보냈다. 아. 뭐라 말하지. 대충 고민하다가 아무말이나 대충 말했다.

 

“아 맞다 나 궁금한거 하나 있어.”

 

“뭔데?”

 

“넌 연애 생각 없냐?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그건 왜 물어보는데.”


“아니 아까 러브레터 받은 거 엄청 싫어하는 것 같길래,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싫어하는 건가 해서 그렇지.”


“...써.”


“뭐?”


“좋아하는 사람있다고.”


“헐 진짜? 누구? 우리 학교야? 같은 학년? 같은 반? 내가 아는 사람이야? 대박 히카루 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

 

히카루의 어깨에 팔을 걸쳐 올린 다음 약간 힘을 주었다. 히카루가 앞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자 히카루의 뒤통수가 보였다. 뒷머리는 내가 질문을 하는 내내 히카루가 헤집어놔서 그런지 산발이 되어 있었다. 가닥가닥 흩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노을 빛이 히카루의 금발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양이 핑크색 솜사탕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히카루의 침묵이 길어지자 괜히 그 핑계로 머리카락을 더 산발로 헤집어 놓으며 입을 열었다.

 

“자자. 이 형님한테 말해봐. 이런거 속에 혼자서 쌓아두면 속병 생긴다잖아. 그냥 편하게 말해봐.”

 

그 말이 무언가 기점이 되었는지 히카루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한숨이라기엔 짧고 깊었다. 얼핏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숨을 쉬고는 히카루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작게 무어라 말했다.

 

"타키가와 나츠히코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작은 속삭임이 어떻게 그렇게 크게 귓가에 울려 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히카루는 이 말을 끝으로 집으로 달려가 버렸다. 잡으려면 손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굳이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히카루에게 전처럼 다가갈 수가 없었다.

 

 


 

“히카루! 그거 뭐야?”

 

하필이면 누군가 내 사물함에 넣어놓은 편지를 꺼냈을 때 나츠가 나를 발견할 줄은 몰랐다. 흠칫 놀란 것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 누가 편지를 뒀네.”


“우와아아아 러~브레터? 히카루! 너! 인기 많았구나! 우오오오~”


그러나 유지하던 평정심이 끊긴 것은 나츠의 신난 듯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너 때문에 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편지를 읽으며, 내가 이런식으로 나츠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마냥 신난 듯한 나츠의 목소리가 괜스레 더더욱 서운했다.

 

“인기가 많긴 뭘. 그리고 거절할거야. 거절할 거라고.”


“어. 아 그래? 알았어.”


나츠히코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먼저 빠르게 걸어 나갔다. 나츠는 마음만 먹으면 내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내 속도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식으로 빠르게 걸을 때 나를 앞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침착해 질 때 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손에 든 편지를 인식하고 뒤돌아 나츠에게 말했다.

 

“이거 학교에서 버리는건 예의가 아니라 집 가서 버리려는 거야.”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저토록 열광하는 나츠가 미웠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편지의 주인에게 답장을 할 것이라고 나츠가 상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편지를 대충 가방에 쑤셔 넣고 길을 걸어갔다. 한 발자국 걸을 때 마다 심장이 한번씩 요동치는 것 같았다. 내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저 태도가 미우면서도 나츠가 내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할 거라고 생각할 뻔 했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그냥 대체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히카루...?”

 

그러나 잔뜩 쭈그러들은 채로 나를 부르는 나츠의 목소리를 듣자 별것 아닌 걸로 심통을 낸게 미안해졌다. 뒤돌지 않은 채로 대답했지만 입술을 앙 물고 있을 나츠의 얼굴이 상상되었다.

 

“왜.”


“어. 화 풀렸냐?”

 

긴장이 풀렸다는 듯이 히히. 하며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는 게 보기 좋았다. 아 정말. 화낼 시간을 주질 않네. 그 웃음 때문인지, 아니면 나츠를 좋아하는 걸 인정한 이후로 도저히 모질게 굴 재간이 없는 탓인지, 나는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화난 적 없었어. 네가 착각한 거겠지.”


“아~ 난 또 아무말도 없길래 화난 줄 알고 쫄았네~”


그렇게 또 능청을 떠는 나츠를 보며 기분이 완전히 풀리려 했던 찰나, 나츠의 말이 나에게 폭탄을 터트렸다.


“아 맞다 나 궁금한거 하나 있어.”


“뭔데?”


“넌 연애 생각 없냐?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그건 왜 물어보는데.”


“아니 아까 러브레터 받은 거 엄청 싫어하는 것 같길래,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싫어하는 건가 해서 그렇지.”

 

아. 정말. 너무했다. 너가 이러면 내가 널 좋아하는게 무의미해지잖아. 의미가 퇴색된다고. 난 절대 너가 생각하는 ‘좋아함’정도의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있어.”


“응?”


“좋아하는 사람있다고.”

 

그제야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듯 나츠는 흥분해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나츠의 그 시끄러운 말들이 소음이 되어 세상 어딘가로 사라졌다. 세상이 고요한 것 같았다.

이제 나츠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찾으려 할것이었다. 저 호기심 많은 성격에 가만히 기다릴 리가 없었다. 그럴바에 차라리. 나츠가 말을 잠깐 멈추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자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있음에도 이정도의 준비 동작이 필요할 정도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타키가와 나츠히코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러나 이 말을 하고 나서 마주본 나츠의 표정을 보고도 그 옆에 있을 용기는 없었다. 결국 나는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츠가 표정을 바꾸고 나에게 달려와 나를 잡아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나츠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거고, 내가 말한 것이었다. 내 감정에 대한 책임을 나츠에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그다지 최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에게 ‘말하나 안하나 똑같다면 그럼 얘기해주는 쪽이 좋지 멍청아!’라는 말을 나에게 해주던 나츠라면, 먼저 다가와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이번엔 내가 똑같이 말해주면 되니까. 어떤 방향이든 좋았다. 내가 아는 나츠라면 이 관계를 영영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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