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나무 님
노을에 히카루의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었다. 어릴적에 가끔 생각한 적이 있었다. ‘히카루가 내 동생이면 어떨까.’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 물론 그 생각의 끝은 그럼 ‘히카루가 히카루가 아니게 되잖아! 그니까 지금이 가장 좋아!’ 라고 마무리 지었었다.
노을에 물든 히카루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그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히카루가 내 동생이었으면, 지금 이런 고민을 하며 사이가 멀어질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무례한 생각인 걸 알고 고개를 저었다. 히카루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부정하고 싶지도,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를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간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불안한 것이었다. 지금은 히카루가 나를 배려해 주고 있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히카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히카루가 마음을 접기로 마음먹고 나와 멀어지려고 하면 나는 잡을 수 없었다. 히카루의 마음을 받아줄 수도 없으면서 친구의 관계로 계속 남자고 하는건 나라도 굉장히 어이없을 것이었다. 선택을 유예한 이유 중에 하나는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내가 히카루에게 상처 줄 용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머뭇거림이 히카루에게 또다른 상처를 준다면, 나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히카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아, 어. 그게. 딱히 심각한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래? 그럼 나 하나만 말해도 돼?”
“어.”
“혹시 내가 힘들어 보인다거나 그런 이유로 나에 대한 네 감정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 나는 그냥 너랑 계속 친구여도 좋으니까.”
“어. 응.”
“아 오글거리네.”
그 말을 끝으로 히카루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느린데다가 얼마 가지도 않아서 금새 지친 것이 눈에 보였지만, 표정으로 보았을때는 민망함에 최대한 빠르게 달린 것 같았다.
“하하하.”
괜히 웃음이 났다. 호탕한 웃음도 헛웃음도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였다.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웃음. 웃음과 같이 기분도 괜히 묘해졌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히카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히카루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전과 후에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작지만 논리적인 말소리도, 조용하지만 확고한 성격도, 은근히 고민이 많은 것도, 전부 똑같았다. 변한 것은 오로지 나 뿐이었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 안심이 되었다.
물론 그 외에도 자세히 관찰하다보니 알게 된 것이 여러개 있었다. 히카루는 아직 연기에 미련이 있었다. 본인은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표정이 밝았고,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히카루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련의 표정이 연기에 대한 미련을 나타낸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히카루가 은근히 나를 자주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히카루를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것 같았다. 흘깃 볼때도, 뚫어져라 보다가 고개를 돌릴 때도 있었다. 이렇게나 많이 쳐다보는데 몰랐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츠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불편했다. 심지어는 그냥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열정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흘깃 몇 번 눈을 마주치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자 나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웃기만 할뿐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저 엉뚱한 녀석이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그만 두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뭐. 이대로 놔두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도 없었다. 불편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즐기자고 생각 한 후 반으로 들어갔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나츠를 좋아한다고 말한 뒤에 나츠가 나를 피하자 어릴때처럼 마작을 같이 두자고 한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대로 멀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말한. 말을 듣고 나츠가 그대로 도망가 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끝일 거라는 불행한 시뮬레이션도 여러번 돌려보았다. 그 이후로 나츠는 나를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저 단순한 머리로 나름대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나의 마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일테니 나쁜 신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괜히 나에게 상처를 줄까봐 급하게 결론을 내릴까봐 한마디 했을때는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후에 나츠가 하는 행동들이나 말을보면 나츠는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나를 존중해 주었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막 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부담스러울테니 그 사실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전부터 하던 나츠를 좋아하는 애들을 은근슬쩍 쳐내는 것도 그만 두었다. 전에는 눈치 없어 몰랐겠지만 이제는 눈에 띌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치졸한 질투로까지 보인다면 최악이었기에 포기는 빨랐다. 다행스럽게도 나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점점 드러나는 것도.
이상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전에 어쩌다 러브레터를 받았다고 히카루를 놀린 것이 무색할 만큼 요즘들어 내게 고백편지나 러브레터가 많이 왔다. 대부분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기에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이름을 밝히고 편지를 쓴 사람만 두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히카루가 보낸건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히카루의 글씨체도 아닌데다가 이런 주접스러운 말을 히카루가 할 리가 없었기에 그 생각은 빠르게 집어치웠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히카루의 한마디 한마디처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내가 거절하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겠지. 하고 넘길 뿐이었다. 물론 편지를 보낸 여자애들과 나의 접점이 히카루 만큼 깊고 넓지 않았기에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이름을 밝힌 두 명 중 한명은 축구부 서포터로 나와 꽤 오래 알았던 사이였다. 그런데도 히카루의 마음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 모르겠다!”
이게 나의 결론이었다. 마침 학교가 끝나고 동아리 활동을 할 시간이었기에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천천히 몸을 풀고 있자 누군가가 다가왔다. 유키였다. 나에게 고백 편지를 보낸 여자애.
“그, 나츠히코. 혹시 편지 봤어?”
“응. 봤어.”
“어떻게 생각해...?”
꼭 모아 쥔 손, 배배 꼬는 발 끝, 붉게 물든 얼굴. 거기다가 유키는 축구부의 남자애들 입에서 종종 나올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왜인지 무감각했다. 고백을 하는 모습도, 어휘도 모두 히카루와 달랐다. 히카루는 어땠더라. 무표정이었던 것 같다. 굉장히 담담했고, 별로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다. 얼굴이 붉었던가? 붉어졌는데 노을 때문에 티가 나지 않았던건지, 아니면 전혀 붉어지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다. 히카루의 얼굴이 붉어진 모습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만약에 붉어져도 절대 나에게 보여주지 않을테지만, 만약에 보게 된다면...
“저, 나츠히코?”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정말? 부디 긍정적인 방향의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유키. 정말 미안하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떠오른 생각에 입이 딱 다물렸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뻔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말도 안됐다.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게 있었으면 히카루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도망다녔을 리가 없었으니까.
아. 거절하는거지? 알았어. 미안해.하며 뒤돌아 뛰어가는 유키의 말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세상에 멍해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도대체 누구? 거절하기 위해서 떠올린 생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진심인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알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나츠히코. 나츠히코! 등 뒤에서 윙윙거리며 나를 부르는 부원들을 말 소리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있을 무렵 부원 하나가 달려왔다.
“부장. 왜그래 갑자기. 유키가 고백해서 그래? 모르기도 어렵지 않았나. 티 엄청 많이 냈잖아. 너만 보면 얼굴 빨개지고, 손 떨고, 목소리 달라지고. 설마 진짜 몰랐어?”
“어. 전혀.”
“와 대박. 눈치는 바닥에 꼬라 박았구나.”
“아 혹시.”
히카루도 나 좋아하는 거 티 냈었어? 많이?
그러나 이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 눈치 빠른 녀석은 내가 이 말을 꺼내자마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릴테니까.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쭈그려 앉아 엄살을 부리는 거였다. 말은 할 수 없으니 떼라도 써야겠다. 엉뚱한 결론이었다.
“으으으.”
“아니 나츠히코 진짜 왜 그래. 유키 찬 거 아니었어? 사실 좋아했던거야? 근데 입시 때문에 찬 거고? 아사바 고등학교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한거야?”
뭐라고 혼자 중얼중얼 떠들떤 녀석은 내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혼자 화장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한 번 더 세수를 한 후 나갔을 때는 축구부에 유키와 내가 이어질 수 없었던 슬픈 사연과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가 쫙 깔린 후였다.그날 나의 패착은 축구부 애들에게만 아니라고 말한 것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 아사바 고등학교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으니까. 정확한 이름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 소문의 주인공이 나와 유키라는 것은 확실시 된 것 같았다.
당황하기도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히카루. 오해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눈치가 더럽게도 없는 반 애들은 나에게 쉬는시간 내내 말을 걸어댔고, 유키를 좋아하는게 아니라고 50번쯤 둘러댄 후 점심시간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히카루를 찾아 학교 전체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체육 창고에서 발견했다. 체육창고 안이 어두운 탓에 히카루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히카루.”
“아, 로미오와 줄리엣 소문 때문에 그러는 거면 전혀 상관 없어.”
“그게 아니라. 그 소문 다 거짓말이라고. 축구부 녀석중에 하나가 마음대로 소문 낸거야.”
그러고 드디어 보인 히카루의 표정은 안도였다. 내내 깨질 것 같이 불안하다가 다시 단단해졌을 때의 그 표정. 그리고 그 표정은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히카루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지만 저 표정은 진심이었다. 히카루와 눈을 마주보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든, 히카루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우리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